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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운영 대표] 외국어 잘해도 연봉 3천 어렵다

우리말 잘해야 외국어도 잘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학업, 갈수록 좁아지는 교수 등용문, 게다가 재정적 압박까지 가해지면서 귀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문대 독어독문과 학. 석사 출신인 H씨는 5년간 독일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으나 끝내 학위를 받지 못한 최근 귀국했습니다. 서른 세살에다 직장 경력이 전무한 H씨의 구직 상담 전화를 받고 나서 솔직히 암담하더군요.

요즘 같은 취업 시장에서 H씨가 적합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처럼 외국에서 장기 유학을 한 이후 학위를 받지 못한 채 귀국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두 명인가. 게다가 그가 자랑하는 독일어 능력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한국에 진출한 독일 기업들이나 독일 기업과 거래중인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통.번역의 경우에도 독일어 시장은 너무나 좁다 등등의 생각이 스쳐가더군요.

그러나 저는 그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인문학 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은 자기 세계가 지나치게 강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편견은 여지없이 깨어졌죠. H씨는 타인의 의사를 존중할 줄알면서도 스스로의 의견을 조리있게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독일 유학생의 성공적 비즈니스맨 변신
나아가 자신의 입장에서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대한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인식도 하고 있더라구요. 한가지 더 다행인 것은 그가 독일 유학중 현지에 파견된 주재원들의 통.번역 업무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인맥을 쌓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자신감만 덧붙인다면 기업에서도 환영받을 만한 인재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독일어도 수준급이고 영업맨적인 기질도 갖고 있으니 독일을 상대로 활발한 영업 활동을 펼치고 있는 기업에서 `즉시 전력’으로 받아줄 만 했습니다.

그에게 두 가지를 조언했습니다. 첫째, 독일에서 만났던 한국인 주재원들에게 구직 사실을 알려라.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라면 그에 대해 신뢰를 갖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죠. 둘째, 해외영업 분야의 면접에 대비한 출사표를 준비하라. 파워포인트로 5장 안팎의 자료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바이어를 상대로 한 해외영업자로서 스스로의 장점과 포부를 밝혀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3주 뒤 H씨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독일에서 만났던 한 대기업 주재원으로부터 독일 지사에서 일할 과장급을 찾고 있는데 지원을 해보라는 언질을 받았다는 겁니다. 저는 그가 준비한 자료를 점검하고 모의 면접을 실시하면서 `예비 학자’가 `예비 세일즈맨’으로 변신해가는 모습을 즐겼습니다.

실제 H씨는 면접을 무사히 치러냈죠. 그가 기업에 와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을 갖고 있던 임원들도 10분 동안 그가 조리 있게 펼쳐나간 프리젠테이션에 반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나자 임원들이 박수를 칠 정도였다고 하니 말입니다. H씨는 국내 교육을 마치고 얼마 전 독일 지사로 부임했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이 이뤄진 것이어서 도와준 저 역시 무척 뿌듯했습니다.

외국어만 잘한다고 연봉 3천 받을 수 있을까?
이와는 상반된 경우도 한번 들어보세요. Y씨는 대기업 프랑스 지사 주재원으로 근무한 부친을 따라 중학교까지 10년간을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귀국 이후에도 대학, 대학원을 거치면서 프랑스어를 전공으로 삼았죠. 프랑스 거주 시절 영어 학교를 다닌 덕분에 그의 프랑스어 및 영어 실력은 거의 원어민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원 졸업 이후 취업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부친의 소개로 Y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 28세인 그는 머리카락중 절반 가량이 빨간색으로 염색돼 있었고 빗질도 되지 않았더군요. 그는 다짜고짜 월급 얘기를 꺼냈습니다. “나보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잘 못하는 친구들이 연봉 2500만원 이상의 조건으로 기업에 입사하는데 날 면접 본 기업들이 제시한 연봉은 그에 못 미치더군요. 자존심이 상해 입사를 거절했어요. 물론 내가 가고 싶었지만 뽑아주지 않은 회사도 많았어요.”

저는 그를 만난 지 5분이 채 되지 않아 왜 그가 취업에 실패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커뮤니케이션 능력 자체가 낙제점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을 자르기 일쑤였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자신을 `저’가 아니라 `나’라고 줄곧 표현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가 불편할 정도였죠. 표정과 말투는 퉁명스러웠고요. 그가 구사한 외국어가 제아무리 빠르고 발음이 좋다 할지라도 그의 외국어 능력을 과연 몇 명이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Y씨는 자신의 꿈이 뭔지, 직업적 목표가 뭔지도 분명치 않았어요. 그냥 자유롭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자신의 관심사라고 하더군요. 이처럼 준비되지 않은 구직자와의 상담은 늘 힘겹습니다. 그는 신입 사원 연봉으로는 다소 높은 편인 3천 만원 정도의 연봉이라야 취업할 생각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취업 상담을 하다보면 장기 해외 거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대부분 프리젠테이션, 대화, 협상 능력이 몸에 배여 있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할 줄도 알죠. 그러나 간혹 Y씨처럼 외국어 구사 실력 하나만을 믿고 한국의 취업 시장을 얕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국어 구사 능력과 업무 능력 무관”
한 취업 포털의 조사에서도 직장인 10명중 6명은 외국어 구사 능력은 업무 능력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평소 `우리말을 잘 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잘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원어민 같
은 발음과 말 빠르기를 자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의사소통의 기본’이 돼 있지 않을 경우에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입니다. 평소 모국어로 말할 때 상대방이 ‘저 사람 말 잘하는군’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어 발음이 좀 거칠다 할지라도 설득력 있는 영어, 업무상 구사 가능한 영어에 근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이 진정으로 원하는 외국어 능력은 발음과 스피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H씨가 독일어 발음이 좋아서 취업에 성공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