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궁의 삶에 대해 존경스러움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조조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실로 오랜만에 `삼국지를 손에 잡았다.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 대한 한글번역판과 편역판이 여러 종류 나온 가운데 바쁜 시간에 단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이 나왔다길래 얼른 구입을 해서 읽기 시작했다.
역시 삼국지는 무수한 읽을 거리를 선사해줬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에서 시작해 영웅호걸들이 세상을 떠나고 삼국이 다시 `진(晉)나라로 통일될 때까지 100년 안팎의 역사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특히 매일같이 문제에 봉착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내야 하는 직장인들과, 또 직장인들의 경력관리 방안과 조직내 대인관계 증진 방안을 컨설팅하고 있는 필자 같은 사람들에겐 한 줄 한 줄이 옛 이야기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오늘 필자는 조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위나라를 세운 인물로서 삼국지 곳곳에서 간계와 술수에 탁월한 간웅으로 그려지고 있는 조조. 중, 고교 시절 읽은 고우영 화백의 만화 삼국지에서도 조조는 턱이 뾰족하고 눈빛에 살의가 번득이는 간교한 인물로 묘사됐던 것으로 기억난다. 조조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장면은 여백사 가족 몰살 사건이다.
무너져가는 제국 한나라의 황제를 폐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동탁을 시해하려다 실패한 조조는 도피길에 올랐다. 조조는 어느 고을에서 체포됐지만 그 고을의 현령인 진궁에게 자신의 대의를 밝혀 결국 감복한 진궁과 함께 길을 나서게 된다. 조조와 진궁은 길을 떠난지 3일째 되던 날 조조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인 여백사의 집에 묵게 됐다. 여백사가 술을 사러 간 사이 조조와 진궁은 우연히 그 집 부엌 쪽에서 사람들이 “묶어서 죽이면 어떨까?”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들을 죽이려는 줄 알고 여백사의 가족 여덟명을 한꺼번에 살해했다. 그러나 부엌 한 구석에 묶인 채 놓여있는 돼지를 발견하고 자신들이 오해했음을 깨닫게 됐지만 조조는 술을 들고 돌아온 여백사마저 죽였다. 진궁이 여백사마저 죽인 조조에 크게 놀라자 조조는 그 유명한 대사를 남긴다. “차라리 내가 세상 사람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조조의 인생 철학을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이런 조조를 죽일 생각까지 했던 진궁은 잠 자는 사이에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조조를 떠났다.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이 비겁하다면 행동에 옮기지 않은 진궁이었다.
물론 역사에서 조조는 승리자다. 훗날 여포의 책사가 된 진궁은 여포와 함께 사로잡혀 조조앞에 무릎을 꿇게 됐다. 이 장면에서도 진궁은 목숨을 구걸한 여포와 달리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이런 진궁이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승리자만 기억한다고 했던가.
일상에서도 우리는 조조처럼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진궁처럼 행동할 것인가를 놓고 선택을해야 할 상황에 자주 처하게 된다. 필자가 읽은 책의 편역자는 해설에서 빨간 신호등에 건너는 사람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 운전자의 예를 든다. 독자 여러분은 이 경우 어떻게 행동할까? 필자는 99% 신호가 바뀌길 기다린다. 뒤에서 빨리 가지 않는다고 경적을 울리는 차들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라고 생각해서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횡단보도 앞의 운전자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다. 연말 승진 인사를 앞두고 승진 대상자는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경쟁자인 입사 동기가 우수한 실적을 보이도록 마음 편히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입사 동기의 승진으로 인해 자신의 승진이 1년이나 2년 늦춰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다른 경우도 있다. 옮긴 회사의 상사가 전 직장에서 취득한 정보나 혹은 전 직장에서 사용한 문서를 내놓을 것을 요구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그 요구를 거절했을 경우 그 이후에 상사와의 불편한 관계, 혹은 나아가 자신의 직장 내 거취까지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면 과연 그 상사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을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구성원인 직장인으로서는 원칙에 얽매인 이상주의자로만 살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 지금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진궁으로만 살 수는 없는 환경이다. 필자 역시 회사에서 매사에 원칙을 지키자는 당부를 수시로 하고 산다. 지나친 원칙주의자라는 주위의 평가를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아마도 `바른생활 사나이로 불릴 정도로 모범생 콤플렉스가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적인 승부에서는 조조가 승리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진궁의 삶에 대해 존경스러움을 갖고 있고 조조의 편을 들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조조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어떤 행동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효율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막히면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하며 잔머리도 지능의 일부다. 조조의 삶이 우리 후세인들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이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