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의 가을은 신선하다. 가을 학기가 첫 학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의 봄과 비슷한 분위기다. 각 지역 출신의 신입생들이 캠퍼스를 활보한다. 대학 구내 서점은 비싼 교재를 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대학원 강의실 역시 새로운 얼굴들이 많다. 다들 긴장한 낯빛이지만 미국 사람들답게 수업 내내 교수에게 질문을 던진다. 교수가 “이 문제에 대한 여러분 생각은 어떠한가요?”라고 물으면 끊이지 않고 학생들의 코멘트가 이어진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북새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미국 학생들이 있다는 것이다. 몇 주째 수업을 같이 들어보지만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미국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 좋아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들은 왜 입을 닫고 있을까. 그렇다. 독자들이 이 글의 제목에서 본 것처럼 이들은 내성적인 사람들이다.
조금만 생각을 해봐도 한국에 있는 내성적인 사람보다 미국의 내성적인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클 것이 분명하다. 한국은 체면문화 때문에 침묵이 오히려 더 높게 평가받거나 최소한 ‘본전은 챙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뭐든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것이 ‘남는 장사’인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비즈니스 코칭 분야에서 내성적인 사람들의 성격 개조, 혹은 리더십 개발은 중요한 주제로 여겨진다.
최근 미국경력개발협회(NCDA) 웹진에 이와 관련한 글이 올라왔다. 제니퍼 칸웨일러(Jennifer Kahnweiler) 박사가 쓴 글이었다. 칸웨일러 박사는 마티 올슨 래니(Marti Olsen Laney) 박사와 더불어 미국 코칭 시장에서 내향성 극복 코칭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코치다. 그는 “여러분은 리더가 되기 위해 반드시 외향적인 성격을 가져야 할까요”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아닙니다”라는 자신의 답변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내성적인 사람들이 겪는 이유와 해결 방안을 언급했다.
2년6개월에 걸친 칸웨일러 박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내성적인 미국인 다섯 명중 네 명이 외향적인 사람이 빨리 승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내성적인 사람의 40% 이상이 가능하다면 자신들의 내향성을 바꾸고 싶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고 한다. 내성적인 사람의 행동적인 특성으로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정보 처리를 하고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말한다’. 말하기 보다는 글쓰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개인사를 드러내기 싫어하며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꺼린다. 이 대목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지극히 내성적이었던 필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학년때 수업 도중에 소변이 급했지만 선생님에게 말하기 부끄러워 조용히 바지에 실례를 했다가 아이들에게 들켜 놀림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돌부처처럼 수업 시간 내내 입 한 마디 떼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하교길에 여학생 두 명만 앞에 서있어도 다른 길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내성적인 사람들은 직장에서 곤란을 겪는 것일까? 칸웨일러 박사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든다. 우선 내성적인 사람들은 사람들로 인해 빨리 지쳐버린다. 우리 말로 ‘사람에 잘 치인다’는 것이다. 사람에 치이다 보니 근무 도중에 두통, 소화불량, 요통 등 온갖 신체적 이상을 느낀다. 신기하게도 사무실 밖에서는 그런 증상이 덜하다.
둘째, ‘노(No)’를 말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과업을 수행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거나 상사에게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달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그 바람에 자신의 역량보다 과중한 과업을 받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상사가 시키는 대로, 그리고 주변 동료들이 부탁하는 대로 받다보니 업무 캘린다는 마감날짜로 가득차 있다. 당연히 업무 성과가 떨어지고 업무와 개인생활의 밸런스를 맞추지도 못한다.
셋째는 자신의 성과나 업적을 세일즈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작은 성과를 부풀리는 재주들이 있다. 요즘의 직장은 자기 실적이나 잠재적 능력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자랑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상사들은 이런 사람들이 실제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다보니 회사에서 중요한 기회가 내성적인 사람들보다는 외향적인 사람들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넷째, 내성적인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많지만 드러내지 않아 손해를 본다. 사내 회의에서도 자기 아이디어를 발표할 순간을 찾다가 결국 기회를 놓친다. 회의뿐만이 아니다. 상사나 동료와 대화를 할 때도 상대방이 외향적인 수다꾼이라면 대화의 주도권을 쉽게 넘겨줘버린다. 모든 아이디어는 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내용이 신선하더라도 시기를 놓치면 무용지물이 되는 셈이다.
다섯째는 사내 정치에 둔감하거나 혹은 이를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명 회사내 권력 다툼이나 이해 관계의 충돌, 혹은 동료나 상사의 낯부끄러운 아부 행위는 역겨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파워 게임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기는 외향적인 사람들은 그 게임을 통해 기회를 잡지만 내성적인 사람들은 아예 기회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다. 필자가 근무했던 회사에서도 회의를 하면 늘 외향적인 직원들만이 아이디어를 낸다. 임원에게 찾아와 자신의 실적을 자랑하는 이들도 외향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소 귀찮고 힘든 일이 생기면 외향적인 사람들은 어디로 가버리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묵묵히 해내곤 했다. 필자가 진행했던 커리어 코칭, 잡서치 코칭도 상당 부분 외향적인 사람들이 수용하기 좋은 솔루션을 제공했었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가 자신을 소개하는 네트워킹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정작 내성적인 사람들에겐 다소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탈출구란 없는가? 칸웨일러 박사가 제시한 솔루션을 바탕으로 우리 직장 문화에서 수용 가능한 다섯 가지 방안을 제시해본다.
첫째, 사내 회의에서 먼저 발언을 하라는 것이다. 질문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회의 초반에 최근의 성과나 자신이 들은 정보를 공개하는 습관을 가져보라는 것이다. 내성적인 필자가 자주 쓰는 방식이다.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생각하고 미리 연습해볼 필요가 있다.
둘째, 이메일이나 문자메세지로 정보나 생각을 교환하기 보다는 얼굴을 마주보거나 전화로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이메일이나 문자메세지는 정보 교환을 빨리 할 수 있는 반면에 상사나 동료, 거래처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 형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사람 사귀는 것이 힘든 내성적인 사람들은 우선 소셜네트워킹 사이트를 이용해 인맥을 만들어보라는 것이다. 평소 사내에서는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던 동료에게 ‘친구 요청’을 해보라. 그리고 좋은 정보를 이들과 공유해보라. 기대하지 않았던 도우미들이 회사 안에 생기게 된다.
넷째, 수다꾼들과 맞서라. 외향적인 수다꾼들을 대화를 주도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를 그냥 두고만 보지 말고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라며 제동을 걸어라. 내성적인 사람이 이런 제동을 걸려면 반드시 사전에 연습을 해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중간에 끊어본 적이 없는 만큼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리허설을 해봐야 실행에 옮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주 웃으라는 것이다. 내성적인 사람들중에는 너무 진지하게 보여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그냥 미소만 짓거나 누군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 조금 크게 웃어줌으로써 그동안의 이미지를 바꿔놓을 수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낸 사람도 웃어준 내성적인 사람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 위의 글은 박운영 부사장이 HR Insight 2010년 10월호 <글로벌 리포트>에 기고한 전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