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등급제가 사회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고교등급제라는 이슈가 사람들을 이렇게 흥분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만 들여다보면 이번에 고교등급제로 문제가 된 대학들은 우리나라 안에서는 `명문 대학’으로 불리는 곳이더군요. 아마 어느 알려지지 않은 대학이 고교등급제를 실시했다고 하면 이만큼 법석을 떨지는 않았겠죠. 반대로 서울대학교가 고교등급제에 연루됐다면 상상하지도 못할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생각도 되는군요.
저는 우리 사회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대학등급제’의 망령을 봅니다. 명문 대학 등급을 보유한 대학을 나와야 세상에 진출하는데 조금이라도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생각에서야 그 `명문대’ 진입 과정에서부터 차별이 있다고 하니 분통이 터지지 않을 리가 없죠.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는 대학 등급제가 실시되고 있는지요? 특정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입사나 승진 과정에서 뭔가 특혜가 있는가요? 몇 가지 사례를 보죠.
“우리 회사를 어떻게 보길래…
SKY 출신만 추천해 주십시오”
제가 몸담고 있는 헤드헌팅사의 고객사인 중견 기업 채용 담당인 K 과장으로부터 며칠 전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우리 회사를 어떻게 보고 그런 사람들을 추천하는 겁니까?”는 항의성 질문으로 그의 전화는 시작됐었죠. “인터넷 사이트에 채용 공고를 내고 사람을 뽑아도 그런 사람들은 넘칩니다. SKY(서울대, 연대, 고대의 별칭) 출신만 추천해주십시오.”
또다른 고객사의 인사팀장은 “서울지역 상위 7개 대학 출신자만 이력서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어느 대학이 7개 대학에 포함되는지 저도 잘 모르겠더군요. 해외 MBA 톱 10, 톱 30 학교 출신자를 찾아달라는 요구 사항은 대기업 MBA 경력자 헤드헌팅 과정에서는 당연시되고 있죠.
경력사원 채용 과정이 이렇다면 신입 사원 공채 과정은 어떨까요? 이번 국감에서 농협중앙회가 도마에 올랐죠. 대졸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서울지역 주요 대학 출신 학생들을 우선 채용했다는 것입니다. 지역할당제까지 약속했던 공기업이 마지막 입사 관문인 면접에 올라온 지원자중 특정 대학 출신자들을 집중적으로 뽑았다는 것이죠.
“서울 지역 상위 7개대 출신 이력서만 보내주십시오”
또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자료로 보면 상당수 국내 대기업들은 신입 사원 채용시 출신 대학에 대한 점수가 전체 점수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하더군요. 다시 말해 대학 성적이나 어학 성적보다도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가 당락을 좌우한다는 것이죠. 저는 1990년대 후반 기자 시절 취재 과정에서 어느 대기업 채용 관계자로부터 대학별, 학과별 등급제 시행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내 대학과 해외 대학들을 등급별로 구분하고 전공 학과에 대해서도 등급을 매겼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변화의 조짐도 있습니다. “저희는 학교를 보지 않습니다. 이력서를 통해 지원자가 얼마나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면접에서는 문제해결 능력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점검해봅니다. 마지막으로는 레퍼런스 체크를 반드시 해봅니다. 전 직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확인해보게 되죠. 굳이 출신대학을 따지지 않더라도 한 사람에 대해 입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의 조짐…면접 강화, 레퍼런스 체크
대학등급제와 거리를 두고 있는 기업들의 채용 담당자들에게 한결같이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대기업의 신입 사원 채용 과정에서도 변화가 엿보입니다. 과거 통과의례로 여겨지던 인. 적성 검사가 개인의 사고능력, 논리력, 직장생활 자세 등을 종합적으로 진단해볼 수 있는 어려운 관문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면접의 중요성이 갈수록 강조되고 있다고도 합니다. 명문대 일색의 신입 사원 채용에 대한 대기업들 내부의 반성의 목소리가 높다는 이야기도 여러 곳을 통해 듣고 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비명문대 출신의 직장인 스타들이 속속 등장해 대학등급제, 고교등급제의 필요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무색케 하고 있습니다. 웅진식품 조운호 사장 같은 이는 상업계 고등학교와 지방대학을 졸업했지만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실적을 내면서 웅진그룹내 최연소 CEO로서 굳건한 위상을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입차 시장의 선두인 BMW코리아의 김효준 사장 역시 상고와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유명 CEO입니다. 이들은 소위 일류대학, 해외 MBA 출신의 사내 경쟁사들이나 또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찬 경쟁사를 제치고 현재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죠.
웅진식품 조운호 사장 같은 비명문대 출신 스타 더 나와야
저는 대학등급제 시행에 대한 딱부러진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익 창출을 목적으로 삼는 기업들이 명문대 출신을 뽑아야 돈을 잘 벌 수 있다면 이들 기업이 대학등급제를 실시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문대 출신이 반드시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느끼는 기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다만 대학등급제에 집착하는 기업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바로 고저 장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음과 낮은 음, 길고 짧은 음이 서로 어울려 나오면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죠. 기업 역시 명문대 출신과 비명문대 출신 인재들이 서로의 특색 있는 장점을 발휘하면서 경쟁해가는 가운데 회사의 경쟁력이 높아지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