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실적 평가의 시기입니다. 직장인들에겐 머리가 슬슬 아파지는 때죠. 기획 부서에서는 내년도 사업계획을 짜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인사 부서에서는 부서별, 개인별 실적 평가를 통해 연말 인사에 반영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특히 월급쟁이 중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다는 전문경영인들은 요즘 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실적이 곧바로 자리를 지키느냐 아니면 짐을 싸야 하는지 결정하는 상황인데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올해 내수 경기가 어떻습니까. 일부 대기업과 수출업종 기업들을 제외하고는 실적 앞에서 자신 있다고 나설 전문경영인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지난주 서울 구로동 디지털단지에 위치한 고객사를 방문했습니다. 외국계 장비를 국내에 수입해 판매하는 IT 유통업체였습니다. 이 회사 K사장이 전해준 이야기는 요즘 전문경영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로 디지털단지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올해 말이나 내년 초에 전문경영인이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도는 회사가 한 두 곳이 아니에요. 이미 대주주로부터 통보를 받은 사장들도 있어요. 대주주나 오너들은 실적 부진을 불경기탓으로 돌려도 잘 이해하지 않으려고 해요. 전문경영인의 능력에 뭔가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라는 시각으로 바라보죠. 올 하반기에 부임한 제 입장에서는 아직 여유가 있지만 내년 경기도 장담할 수 없으니 저 역시 불안하죠.”
“올해 말에 옷 벗는 사장 많을 듯”
얼마 전까지 외국계 회사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담당 전문 경영인을 지냈던 L씨도 비슷한 내용을 전해주셨습니다. “올해 말에 옷 벗는 사장들이 많을 겁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지분이 많은 상당수 상장기업이나 코스닥등록사의 경우 투자자들로부터 전문경영인 교체 요구에 직면해있다고 봐요. 세계 경기가 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는데 왜 유독 한국만 바닥을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외국인 투자자들은 선장 교체론을 들고 나오고 있는 거죠.”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은 그 입지가 무척 약한 편입니다. 글로벌 기업의 전문 경영인에 비해 영향력이 무척 작은 편이죠. 삼성그룹 전 계열사 사장들을 합쳐도 이건희 회장 한명의 영향력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지난 2001년 미국 HP사의 여성 전문경영인 칼리 피오리나가 컴팩을 인수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HP 대주주인 휼렛 가문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피오리나는 대주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른 주주들을 설득해서 결국 이사회에서 컴팩 인수에 대한 동의를 얻는데 성공했죠.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일까요. 5%도 안되는 지분을 가진 대주주이지만 과연 이들의 뜻을 거슬러 기업 인수 합병을 지휘할 `간 큰’ 전문경영인은 없을 겁니다.
한국 전문경영인 위상, 말이 아니다
한국의 전문경영인의 위상에 대한 최근의 두 사례를 말씀드릴께요. 올해 국내 유명 제조업체는 전문경영인 사장을 갑자기 교체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상장 기업의 사장급 경영자를 교체할 때는 분명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도 언론 기사에서는 분명한 까닭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전문경영인은 회사 창사 초기 때부터 몸담아온 창업 공신과 같은 존재로서 후배 임직원들의 존경을 받아온 기술자 출신이었습니다. 재계에서는 특정 부서에만 지급해야 할 특별 상여금이 지나치게 많은 임직원들에게 지급된 바람에 대주주의 신경을 건드린 게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확인할 도리는 없습니다.
또 다른 한 정보통신 회사는 전문경영인이 대주주의 2세와 마찰을 빚자 자의반 타의반 형식으로 부임한지 반년도 되지 않은 전문경영인이 그만두도록 했습니다.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와 거래를 해달라는 2세의 요구를 전문경영인이 거부했기 때문이었죠. 과거 왕조시대에 임금이 왕비나 후궁의 베개 송사에 충신을 내쳤던 얘기가 떠오릅니다.
창업주나 대주주의 독단적인 경영 방식과 경기를 고려하지 않은 외국인 투자자들의 실적 위주 조급증이라는 이중 압력에 우리의 전문 경영인들은 떨고 있습니다. 불황을 타개하려는 전문 경영인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임기 동안 자신의 포부대로 회사를 경영해갈 수 있는 풍토, 또 한번 맡겼으면 지긋이 기다려줄 줄도 아는 투자자들의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