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여러분, 추석 연휴는 잘 쇠셨는지요? 고속철도 좌석 위 짐칸이 텅텅 비었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로 이번 추석에는 고향 가는 보따리가 가벼웠다는 게 어디를 가더라도 화제가 되더군요. 이와 함께 이번 연휴 중 제 관심을 끈 뉴스는 '산업스파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벤처 신화로 잘 알려진 의료기 제조업체 M사에 근무하던 30대 중반의 연구원이 독일계 경쟁사인 S사로 옮기면서 M사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초음파 의료진단기의 기술 및 영업 정보를 반출한 것이 발각됐다는 게 요지입니다. 유출된 정보의 분량이 100만 쪽에 이른다 하니 사안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 짐작이 갑니다.
M사는 국내 유일의 초음파 의료진단기 제조사로서 이 분야 세계 7위권 업체인데다 문제의 S사가 한때 M사의 인수 여부를 검토한 적도 있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는 곳입니다. M사가 초음파 진단기 개발에 들인 돈은 420억원. 그런데 이번에 적발된 연구원은 M사에서 5500만원의 연봉을 받다 S사로 옮겨 7100만원을 받게 됐다고 하는군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1600만원을 더 받아 경쟁사로 옮긴 한 사람으로 인해 420억원을 들인 국내 벤처 기업의 핵심 기술이 새어나간 것이죠.
연봉 1600만원 더 받고 420억 핵심기술 유출
우수 인재의 추천 및 스카우트 업무를 진행하는 헤드헌팅 업계에 있는 필자로서는 정도의 차이이지 이번
사건과 유사한 일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국내 기업이나 외국계 기업이나 경력자 스카우트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경력자를 뽑아오겠습니까? 자사와 전혀 무관한 업종과 직종에 있는 경력자를 채용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경쟁사에서 스카우트해오는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경쟁사의 핵심 인재들은 굳이 자료를 복사해서 들고 오지 않아도 머리 속에 온갖 정보를 다 가진 이들이니 그들만 데려올 수 있다면 곧바로 현업에 활용할 수 있는 것이죠. 특히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해외 유명 경쟁사의 인력에 대해 탐내지 않는 기업이 있겠습니까? 국내 굴지의 그룹사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해외 경쟁사의 우수 인재를 스카우트해오지 못한 전문경영인을 강하게 힐책했다는 미확인 정보도 작년에 증권가에 나돌기도 했었죠.
경쟁사 핵심인재 머리 속에 기업 비밀이 고스란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산업 보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범국가적인 문제로 삼는 것은 기술의 해외 유출을 통한 국가 자산의 붕괴에 대한 우려 때문입니다. 기술에도 국적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한 사례를 들려 드릴께요. 제가 아는 한 헤드헌터는 수 년 전 중국 전자업체의 의뢰로 국내 가전업체의 백색 가전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연봉 인상에다 현지 주택비 제공은 물론이고 김치까지 담궈 주겠다는 세심한 배려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 프로젝트의 결과를 알 수는 없지만 오늘날 백색 가전에서 중국이 우리나라를 능가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면 그 일이 생각납니다.
중국 기업 이직 한국 직원, ‘토사구팽’
또 다른 사례도 있습니다. 국내 대형 유통업체 간부급 직원이었던 A씨는 회사의 중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중국 현지 유통업체에 스카우트됐습니다. A씨는 그곳에서 중국 직원들을 매일같이 한 곳에 모아놓고 유통업에 대한 사내 교육을 시키고 한국식 할인매장의 성공 비법을 전수했다고 합니다. 결국 A사가 원래 몸담고 있던 국내 회사는 중국 시장 진출에 어려움을 겪은 반면에 그의 노하우를 전수한 중국 기업은 새로운 유통방식을 적용해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A씨는 지난해 중국 회사에서 임금이 높다는 이유로 사직을 강요 받아 결국 사표를 던졌습니다. 토사구팽된 것이죠. 요즘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반도체, 휴대폰, 디스플레이 업종에서 백색 가전이나 유통업과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찔해집니다. 몇몇 사람의 이직으로 인해 국가 중추 산업의 기반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과장만은 아닐 것입니다.
산업스파이 법만으로는 해결 안돼
정부에서는 산업보안에 힘쓰는 기업을 지원하고 산업스파이의 활동을 막는 내용의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법만으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국 기업의 핵심 기술을 노리는 외국기업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고 외국기업으로의 이직을 원하는 직장인들은 꾸준히 존재할 것입니다. 유명 외국기업들이 앞을 다퉈 한국에 연구개발 센터를 설치하겠다고 하는데 그 심중에는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결론은 기업과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기업들은 핵심 기술을 개발했거나 접근할 수 있는 인재들에 대한 처우를 대폭 개선해야 합니다. 낮은 급여로 언제까지 우수 인재를 묶어둘 수 있겠습니까? 이공계 인력 대우에 대한 문제는 국가 산업 보안과도 관련한 문제라는 인식을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들도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더불어 몇몇 대기업이 시행하고 있듯이 경쟁사 이직을 제한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고용계약서에 비밀정보 취급에 대한 조항을 삽입하고 별도의 서약서를 받는 등의 노력도 해야 할 것입니다. 업무 중 취득한 정보를 누출시키지 않는다는 다짐과 그 책임을 묻겠다는 강력한 의지는 국가정보원에서만 해당될 게 아니죠.
개인들은 자신에게 고유의 국적이 있듯이 기술에도 국적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당장은 자신의 연봉이 오를 수 있을지 몰라도 좀더 멀리 보면 내 형제, 아이, 친지들이 살아가야 할 이 나라의 국부를 줄이게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