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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성공한 리더들의 말

윈스터 처칠
저술가. 웅변가이자 정치가인 윈스턴 처칠 경은 전시 영국의 총리로서 영국을 패배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승리로 이끌었다. 1874년 영국의 옥스퍼드 주에서 태어난 처칠은 1차 세계대전에서 군 장교로 조국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의회 의원이 된 뒤 그는 여러 차례 히틀러가 주도하는 독일의 위협에 대해 경고했다. 그와 더불어 공격적이고 설득력 있는 연설 솜씨로 1939년 총리에 임명되었다. 1940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요시프 스탈린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전략을 구상했다. 철저한 애국주의자이며 낭만적이라 할 만큼 조국의 위대함을 굳게 믿었던 처칠은, 강력한 리더십과 헌신적 열정으로 국민들을 이끌어 결국 영국의 군사적 위기를 타개했다. 그는 1953년 저서 `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해에 기사 작위도 받았다.
"위대함의 대가는 책임감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교훈은 바보라도 때로는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나는 남의 가르침을 언제나 환영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배울 자세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원칙을 희생하고서라도 소속 정당을 옮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당을 희생하고서라도 자신의 원칙은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전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은 누구나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포효를 울리라는 명을 받았다. 화해를 주선하는 사람은 악어에게 먹이를 주면서 자기를 맨 나중에 잡아먹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도로 삼켜도 잘 소화가 되지 않는다. 복수만큼 값이 비싸면서도 무익한 것은 없다. 용기가 없다면 모든 미덕이 의미를 잃는다. 정치는 전쟁만큼이나 흥미로우면서도 위험하다. 전쟁에서는 한 번만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 민족에게서든 존경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광신자란 자기 마음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려 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어떤 사회에서든 아기에게 우유를 주는 것 보다 더 훌륭한 투자는 없다. 너무 멀리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다. 운명의 사슬에서는 한 번에 하나의 고리만 다룰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
영국의 지배에 맞서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한 모한디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정치.사회적 진보를 달성하기 위해 비폭력주의를 강조한 그의 주장은 국제적으로도 널리 존중된다. 간디는 인도에서 교육을 받은 다음 1888년 영국에 가서 법을 공부했다. 그 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서기로 할 때 목격한 인종 차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동료 인도인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일을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의 탄압을 받아 투옥되기도 했다. 1919년 인도의 정계에 입문해서 영국의 치안 유지법에 저항했으며 이어 인도 국민회의의 수반이 되었고, 인도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도 탄압을 받았던 간디는 마침내 1947년 인도 자치국을 수립하는 협상을 성사 시켰다. 그러나 이듬해에 암살되고 말았다.
"증오는 오직 사랑으로써만 극복할 수 있다. 약한 자는 결코 남을 용서할 수 없다.
용서란 강한 자가 지닌 속성이다.
진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우리는 마음 속에서 진리를 찾아야 하며, 자신이 찾은 진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진리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잘못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자유는 가치가 없다. 인내란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을 뜻한다. 신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신념은 이성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맹목적인 신념은 죽는다. 배타적인 성향을 지닌 문화는 결코 존속할 수 없다. 만족감은 달성이 아니라 노력에 있다. 전력을 다한 노력이야말로 완전한 승리다.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독재자는 내 안의 고요한 목소리뿐이다. 정당한 차이는 진보의 건강한 신호이다."


공자
공자는 중국의 가장 유명한 스승이자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이다. 그의 사상은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으며, 독학을 통해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사회적 상황에 크게 실망하고, 사회 개혁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공자는 주로 성실을 강조했으며, 그의 가르침은 대부분 윤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공자는 국가가 지배자들의 쾌락이 아니라 백성들의 행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개혁 사상을 실현한 만한 공적인 지위를 얻지 못한 탓에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의 가르침은 사후에 제자들이 기록한 `논어`라는 책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후 `논어`는 회적 생활 양식의 근간이 되었으며, 공자를 동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재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쓰지는 말라. 세상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 나라를 바로잡으려면 먼저 가족을 바로 잡아야 한다. 가족을 바로잡으려면 먼저 자신의 생활을 닦아야 한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신의 심성을 바로잡는 일이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면 인생에서 하루도 일할 필요가 없다. 어진 자는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 의혹을 품지 않으며, 용감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옳은 것을 알고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옛 것을 되새겨 새 것을 살필 줄 알면 능히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말의 힘을 알지 못하면 더 이상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늘을 얻는 자는 자신의 마음 속에 하늘을 가진 사람이다."


노먼 빈센트 필
낙관적인 종교 철학과 화려한 웅변술을 바탕으로 노먼 빈센트 필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개신교 목사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라디오, TV, 신문을 이용하여 수백만 명에게 기도의 은총을 강조하는 자신의 메시지를 퍼뜨렸다. 필은 오하이오의 바워스빌에서 감리교 설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보스턴 공과대학에 다녔으며, 1922년 감리교회에서 목사 서품을 받았다. 10년 후 필은 뉴욕의 마블 개혁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종교의 주요 임무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런 주제로 `긍정적 사고의 힘`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썼다. 그의 설교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는 신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 기도와 긍정적 사고의 힘에 대한 확신이었다. 필은 또한 미국 종교 및 정신의학 협회의 창립에 기여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실은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보다 중요하지 않다.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겪는 문제는 비판으로 구원받기보다 칭찬으로 망치기 쉽다는 점이다. 자신이 패배했고 그 패배가 오래 간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정사실이 되기 쉽다. 오늘과 매일매일을 위한 일을 계획한 다음 그 계획을 실행하라. 기대하는 만큼 얻게 마련이다. 모든 것에 대해 열정적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특히 자신의 일에 관해서는 더욱 열정을 품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인생에서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일을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면 쉽게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가능성을 믿어라. 사태가 아무리 어두워 보이고 실제로 어둡다 하더라도 시선을 높여 가능성을 바라보라. 가능성은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게 긍정하고, 크게 믿고, 크게 기도하면 큰 일이 실현된다. 우리는 대개 복잡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며 단순한 것은 회피한다."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의 사상가, 철학자, 과학자, 작가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이다. 철학과 과학의 발전에 그가 남긴 공헌은 서구적 지성과 사상의 표준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엄청나다. 그는 형식논리학을 발명했으며, 그 원리를 물리학, 화학, 생물학, 동물학에 적용했다. 또한 인간 존재의 현상을 꿰뚫어보는 그의 능력은 심리학과 문학의 영역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정치학과 윤리학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저작과 발언은 현대 철학에서도 여전히 읽히며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육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와 똑같다. 희망이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신이 내린 선물이다. 친구란 무엇인가? 친구는 하나의 영혼이 두 개의 몸에 거주하는 것이다. 교육은 노년을 위한 최선의 준비다. 자기 행동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다. 다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친구가 없다면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만물에는 경이로운 것이 있다. 자연은 불필요한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 좋은 시작은 절반의 완성이다. 확실해 보이는 불가능성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가능성보다 언제나 더 낫다. 미덕이란 단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반드시 지니고 사용해야만 한다. 존엄성은 명예를 소유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누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데서 온다."


마틴 루터 킹
마틴 루터 킹은 강한 개성과 뛰어난 웅변술로 1950년대와 60년대에 미국의 인권 운동을 이끌었다. 침례교 목사였던 킹은 1955년 앨러배마의 몽고메리에서 인종 차별적 버스 탑승 제도를 거부하는 것으로 인권 운동을 시작했다. 1957년 그는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를 창립하고,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비폭력 투쟁을 조직했다. `워싱턴 행진` 이 절정에 달한 1963년 8월 28일 모든 인종의 미국인 20만 명이 킹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링컨 기념관에 운집했다. 1964년 의회에서 민권법이 통과됨으로써 킹의 인권운동은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 성과로 킹은 사상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러나 1968년 암살범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세계는 자유와 정의의 숭고한 상징을 잃었다.
"생각해야 한다는 것만큼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나에겐 꿈이 하나 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떨쳐 일어나, 당당히 이 신념을 실현해낼 거라는 꿈이다. 우리는 진실이 스스로 그 가치를 증명할 거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 진실이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목숨을 걸 만한 것을 찾지 못한 사람은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다. 어둠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고, 오직 빛만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증오는 증오를 몰아낼 수 없고, 사랑만이 증오를 몰아낼 수 있다. 나는 맨손의 진리와 무조건적 사랑이 현실에서의 마지막 약속이라고 믿는다. 거리의 청소부라 불릴 자격을 얻으려면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이, 베토벤이 음악을 작곡하듯이, 세익스피어가 시를 쓰듯이 거리를 청소해야 한다. 장차 하늘과 땅의 모든 주인들이 "여기 자기 일을 충실히 수행한 위대한 청소부가 있었노라"고 감탄 할 만큼 거리를 깨끗이 청소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독사의 강인함과 비둘기의 부드러움을, 즉 강인한 정신과 친절한 마음을 결합시켜야 한다. 한 곳에 부정이 있으면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하게 된다. 사악한 사람은 음모를 꾸미지만, 선량한 사람은 계획을 세운다. 사악한 사람은 증오의 추악한 말을 외치지만, 선량한 사람은 영예로운 사랑을 위해 헌신한다"


조시 패튼
냉혹하고 비정하고 고집스럽다는 말은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미국 최고의 장군인 조지 패튼을 묘사하는 일부의 수식어에 불과하다. 그는 전차와 장갑차를 이용한 전술에 능했다. 탱크 부대 사령관으로서 그의 용맹은 특히 불주 전투에서 독일군의 역공을 저지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1944년 여름 그는 전통적인 전술을 무시하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가차없이 진공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45년 1월 패튼의 군단은 독일 국경에까지 접근하면서 수천 명의 독일군을 포로로 잡았다. 패튼은 군대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논쟁적인 인물 중의 하나로 꼽혔다. 비록 그의 거침없는 언사와 예측 불가능한 행동은 민간 정부 당국자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그는 휘하 병사들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그는 거친 태도 때문에 `지독한 노인`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부하들에게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마라. 그저 무엇을 하라고만 명령하면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창성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면 누군가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도전을 받아들여야 승리의 환희를 느낄 수 있다. 전쟁은 무기로 하는 것이지만 승리는 사람이 거두는 것이다.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따르는 사람들의 정신과 이끄는 사람의 정신이다. 병사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자신감이다. 하나에만 전념해야 한다. 자신이 결정한 한가지 목표만을 추구하라. 언제나 필요한 만큼 이상의 일을 해라. 전투에서 이기려면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마음이 몸을 움직이게 해야지 몸이 마음을 명령하게 하면 이길 수 없다.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지 내 안에서 "멈추지 마. 누군가는 정상에 올라야 하는데 바로 네가 해보지 그래?" 하고 말하면서 힘차게 뛰는 엔진이 속도를 늦추게 되는 것뿐이다. 한 방울의 땀이 한 동이의 피를 구한다. 최선을 다한다면 뭘 더 바라겠는가?"


교황 요한 바오르 2세
1978년 교황으로 취임한 요한 바오르 2세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최초의 폴란드 출신 교황이자 456년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인이 아닌 성직자로서 교황이 된 사람이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교의를 전세계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리는 업적을 남겼다. 풀란드의 바도비체에서 카롤 보이틸라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교황은 폴란드 문학을 공부하고 화학 공장에서 일하던 중에 2차 세계대전을 맞았다. 사제가 될 결심을 굳힌 그는 크라코프 대주교궁에 은신하다가 1946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윤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철학 교수를 역임한 뒤 크라코프 대주교가 되었다. 1967년 추기경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10년만에 교황위에 올랐다. 교황은 여러 나라 말에 능통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국제적 대사로서 널리 말씀을 전하는 데 애썼으며, 1981년에 암살의 위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형제가 되고자 한다면 무기를 버려라. 전쟁은 비극적인 과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미래의 세상에는 전쟁이 발붙일 곳이 사라져야 한다. 목적을 가지지 않는 자유,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법의 지배를 받고자 하지 않는 자유,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유, 그런 자유는 인관가 사회에 반하는 것이다. 명랑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는 부모와 자식이 모두 노력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다른 식구들의 종복이 되어야 한다."


존 F. 케네디
존 F. 케네디는 43세에 미국 35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써 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가톨릭교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케네디는 1936년에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 해군에 입대했다가 곧이어 벌어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태평양에서 현역으로 복무하던 중 그의 지휘하에 있는 함선이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는 사태를 겪었다. 그는 등에 부상을 입은 몸으로도 휘하 승무원들을 구조하는 영웅적 행위를 보였다. 하원과 상원을 거친 뒤 19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독특한 스타일과 카리스마. 뛰어난 연설 솜씨로 국내외에서 높은 평판을 받았으나 1963년 암살범의 총탄을 맞고 짧고 비극적으로 삶을 마쳤다. 그의 주요 치적으로는 평화봉사단을 창립한 것과 쿠바 미사일 위기를 훌륭하게 해결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저서 `용기 있는 사람들`은 1957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의 동료 국민들이여, 여러분의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묻지 말고, 여러분의 나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물으라. 우리는 무엇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추구한다. 모든 민족이 상호 존경 속에서 함께 살면서 상호 존중 속에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것이다. 활력과 신념, 헌신성으로 노력하면 우리의 나라와 나라를 위해 일하는 모든 이들에게 밝은 빛이 될 것이며. 그 빛은 다시 전세계를 밝히는 참된 불로 자라날 것이다. 평화로운 혁명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들은 폭력적인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 것이다. 해가 있을 때 지붕을 고쳐야 한다. 자식 교육을 잘못하면 자식을 잃게 된다. 내가 바라는 우리 나라는 군사력과 도덕적 절제. 재력과 지혜, 힘과 목적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룬 나라다. 인간은 개인적인 대가가 따른다 할지라도, 장애물과 위험과 부담감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그게 바로 모든 인간적 도덕의 기본이다. 적을 용서하되 그 이름은 잊지 말라. 두려움에서 협상하지 말고, 협상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헨리 포드
공학의 천재이자 대중의 영웅으로 이름을 떨친 헨리 포드는 자동차 산업에서 창조성을 발휘했다. 그의 혁신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 사회적 성격을 크게 바꾸었다. 포드는 `T 모델`을 대량생산용 자동차로 개발해서 보통 사람이 구입할 수 있는 가격으로 판매했다. 대량 생산에 조립 라인을 사용함으로써 절약할 수 있게 된 시간과 경비를 활용해서 더 많은 자동차를 그 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낮은 가격으로 사람에게 공급하였다. `T 모델` 은 1908년부터 1927년까지 미국에서 1,500여만 대나 팔렸다. 박애주의자로도 유명했던 포드는 미시간의 디어본에 역사적 건물들을 모아 그린필드 빌리지를 건설했다. 또한 헨리 포드 박물관과 포드 재단도 설립했다.
"멈추는 자는 스무 살이든 여든 살이든 상관없이 늙은 사람이다. 반면 끊임없이 배우는 자는 누구나 젊다.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은 자신의 마음을 젊게 유지하는 일이다. 실패는 단지 더 현명하게 시작할 기회일 뿐이다.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당신이 옳다. 모이는 것은 시작이고, 함께 있는 것은 진행이며, 함께 일하는 것은 성공이다. 큰 일도 작은 일들로 나누면 특별히 어렵지 않다. 자립하기 위해 돈을 바란다면 결코 그것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하게 참된 보장은 지식과 경험, 능력의 보고이다.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고용주가 아니다. 그는 단지 돈을 관리할 뿐이다.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생산품이다. 실수라 해도 얼마든지 가치 있는 성취를 위해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다. 기업은 마치 병아리처럼 땅을 파서 원하는 것을 얻을 때 가장 건강할 수 있다. 이상주의자란 다른 사람들이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허물을 찾지 말고 해결책을 찾아라."


테레사 수녀
아그네스 곤자 보야주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토록 헌신한 것으로 큰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인도의 빈민들을 위해 활동했다. 1928년 열여덟 살이던 그녀는 아일랜드로 가서 성모마리아 학교에 들어갔다가, 곧이어 인도로 가서 캘커타의 빈민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간호학을 공부한 뒤 캘커타 시의 빈민가로 이주해서 사랑의 선교회를 창립했다. 1968년 테레사 수녀는 로마로 호출되어 빈민들을 위한 집을 세웠으며, 3년 뒤에 처음으로 교황 요한 23세가 수여하는 평화상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 1,000명이 넘는 사랑의 선교회 소속 수녀들은 캘커타의 60개 센터와 전세계에 걸쳐 200곳이 넘는 센터에서 활동했다. 빈민들을 돕기 위한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캘커타에서만도 약 8,000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한 열정과 헌신적인 사랑으로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 다만 위대한 사랑으로 작은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세상에 사랑의 편지를 보내시는 하느님의 수중에 있는 작은 연필이다. 오늘날의 가장 큰 질병은 나병이나 결핵이 아니라 소외감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활동이 마치 우리의 사명인 것처럼 착각한다. 우리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성공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성실을 요청한다. 고독감과 소외감은 가장 비참한 빈곤이다."


더글러스 맥아더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명석하고 논쟁을 즐겼던 그는 1차,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에서 요직들을 두루 거치며 자신의 꿈과 야망을 실현해갔다. 1차 세계대전 중 맥아더는 장군으로 진급해서 육군 참모장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필리핀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일본 점령군의 연합군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곧바로 UN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곧이어 대규모 중국군의 저항을 받아 트루먼 대통령과의 관계가 크게 악화되었다. 트루먼은 국지전을 주장했지만 맥아더는 선제 공격을 시도했다. 결국 그는 1951년에 명령 불복종으로 해임되었다. 그 뒤 여느 때처럼 초연한 태도로 사생활로 돌아왔다. 맥아더는 의무와 명예를 숭상하고 조국에 열정적으로 헌신한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있다. 젊음이란 단지 나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 상태의 문제다.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다 늙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념을 포기했을 때 사람은 늙는다. 신념이 있으면 젊고, 의심이 많아지면 늙는다. 자신감이 넘치면 젊고, 두려움이 많아지면 늙는다. 희망이 있으면 젊고, 절망이 크면 늙는다. 인생에는 확실한 것이란 없고 오로지 기회만 있을 뿐이다. 승리하겠다는 의지가 없이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오랜 세월 빛을 찾아다니던 결과 종국에는 진리가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이시여, 저를 이런 사람으로 만들어주소서. 언제 자신이 약한지 알 수 있을 만큼 강하며, 두려워하는 자신을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고, 정직한 패배 앞에서 자랑스럽고 꿋꿋하며, 승리 앞에서 겸손하고 점잖은 그런 사람이 되게 해주소서. 모든 사람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기록실이 있다. 그 방에 아름다움, 희망, 갈채, 용기의 메시지가 가득한 사람은 젊다. 반면에 커튼이 드리워지고 비관의 눈발과 냉소의 얼음만이 가득하다면 늙은 사람이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최고 사령관과 미국 34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직, 겸손, 인내가 함께 어우러진 결과였다. 아이젠하워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차 세계대전에서 탱크 훈련소 소장을 역임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육군의 전쟁 계획 부서에 배치되어 연합군의 유럽 공격을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이후 그는 유럽의 미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군에서 퇴임한 뒤에는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을 맡으면서 전쟁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민주와 공화 양당의 구애를 받았으나 1952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공화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서 모두 승리했다. 아이젠하워는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고 최저임금을 증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보건부, 교육 및 복지부, NASA를 창립하는 업적도 남겼다.
"자유 세계는 과거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마음 속에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가질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비상시에는 무력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직 정의, 부드러움, 배려, 협력만이 인류를 항구적인 평화로 이끌어갈수 있다. 자유는 인간의 마음, 행동 정신 속에서 살아 있다. 그러므로 자유는 매일 새로이 얻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생명의 뿌리가 잘려나간 꽃처럼 자유는 시들고 죽어버릴 것이다. 현명한 사람과 용감한 사람은 역사의 궤도 위에 누워 미래의 열차가 자신을 치고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
마거릿 대처는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으로서 총리에 당선된 인물이다. 잡화상 집안의 딸로 태어난 대처는 옥스퍼드에서 화학으로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 보수 연합의 회장이 되었다. 1950년대에 화학 연구자로 일하면서 동시에 법과 세금제도를 공부했다. 1950년 대처는 처음으로 의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195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녀는 연금 및 국가보험 정무차관을 역임했으며, 그 후에는 교육 및 과학 담당 장관으로 일했다. 1975년 보수당의 당수로 당선되었고, 1979년 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함으로써 총리가 되어 1990년 까지 재임했다.
"장관들이 내가 말한 대로 실행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들이 말을 많이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우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흥미를 가져야 하며,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의 목적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을 나는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까다롭지 않고 오히려 놀랄 만큼 부드러운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지는 않는다. 승리를 거두려면 여러 번의 전투를 치러야 한다. 최종적으로 내가 택한 방향으로 가기만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다.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관은 우리 나라가 위대했을 때의 가치관이었다. 외교에 관해 "의도적인 거짓말은 하면 안되지만 때때로 모호한 태도를 취할 필요도 있죠." 노력 없이 정상에 오른 사람은 없다. 노력이 바로 성공의 비결이다. 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지상에서 벌어야 하는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링컨은 남북전쟁 시기에 연방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타고난 성실성과 정직성, 결단력, 유머, 용기를 가지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유혈이 낭자한 시기에 나라를 이끌었다. 1809년 켄터키의 벽지에서 태어난 링컨은 철도 노동자, 선원, 잡화점 직원, 우체국장, 측량기사 등의 일을 하다가 법률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상원의원 선거에서 벌인 공개토론으로 전국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고, 186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무렵, 노예제 문제 때문에 이미 일곱 개 주가 연방을 탈퇴한 상태였다. 1863년 노예 해방을 선언함으로써 반대하는 주들의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남북전쟁 중에는 여러 전투에서 직접 총사령관을 맡았는데, 그의 군사적 재능은 연방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864년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나, 남부의 재건을 지휘하기 전에 암살되는 비운을 당했다.
"역경에 대처하는 것은 거의 모두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물됨을 시험하고자 한다면 그에게 권한을 부여하라. 한 통의 쓸개즙보다 한 방울의 꿀이 더 많은 파리를 잡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먼저 자신이 그의 성실한 친구라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바로 그것이 그의 마음을 잡을 수 있고 그의 의지를 합리성으로 향하는 큰 길로 이끌 수 있는 한 방울의 꿀이다. 미래가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은 한 번에 하루씩만 닥친다는 것이다. 재치란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줄 아는 능력이다. 내 경험이 말해주는 바에 따르면, 악덕이 전혀 없는 사람은 미덕도 별로 없다. 거짓말은 통하게 만들 만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없다. 어제보다 오늘 더 현명해지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적과 친구가 된다면 그것은 곧 적을 쳐부수는 게 아닐까? 성공하려는 자신의 의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음을 항상 명심하라. 나는 내가 아는 한,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내 그렇게 할 작정이다. 무력은 모든 것을 정복하지만, 무력에 의한 승리는 오래 가지 않는다. 그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은 그를 영원히 돕는게 아니다. 나의 꿈은 이 나라를 다시 한번 세계의 마지막이자 최선의 희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앤드루 카네기
앤드루 카네기는 기업가적 성공과 시민의 책무가 잘 결합된 표상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믿었고 그 믿음을 실천했다. 1848년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열세 살 때부터 면화 공장에서 주급 1달러 25센트를 받고 얼레를 잡는 일을 시작했다. 곧이어 철도 전신소로 직장을 옮겼으며, 이 후 한시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철도 산업의 성장에 따른 수요를 예측한 카네기는 빌린 돈에 얼마 안 되는 자신의 봉급까지 합쳐 석유와 철강에 투자했다. 이 투자는 나중에 카네기 철강회사라는 대기업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철강회사가 성장하면서 카네기는 당대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서 수많은 문화, 교육, 과학 재단들을 설립했다. 1911년에 창립된 카네기 법인은 전세계에 걸쳐 수천 개에 이르는 공공 도서관의 창설을 지원했다.
"명예에 따르는 상처는 모두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저 사람들이 하는 일을 지켜볼 따름이다. 스스로를 돕지 않는 자를 도우려 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스스로 사다리를 올라가려는 의지가 없는 자를 억지로 떠밀어 올라가게 만들 수는 없다. 나의 신조는 집중이다. 첫째는 정직이고, 다음은 근면이며, 그 다음은 집중이다. 잉여의 부는 그 소유자가 평생 동안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잘 운영해야 하는 신성한 위탁이다. 집중이란 자기가 가진 달걀들을 한 바구니에 넣고 그 바구니를 잘 관리하는 것과 같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힘과 능력 중에서 25퍼센트만을 자신의 일에 쏟아 붓는다. 자신이 지닌 역량의 50퍼센트 이상을 투입하는 사람은 성공할 것이며, 100퍼센트를 바치는 사람은 성공의 정점에 오를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형제애의 유대감이라는 조화로운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토머스 제퍼슨
미국의 3대 대통령이자 초대 국무장관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은 독립선언문을 쓴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유한 버지니아 이주민 출신인 제퍼슨은 1769년 시의회 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2회 대륙회의의 대표가 된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와 함께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공식적 이유의 초안을 잡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 결과로 나온 독립선언문은 주로 제퍼슨이 집필했는데, 신생국이 생존과 자유, 자치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뒤 제퍼슨은 프랑스 대사로 일하다가 조지 워싱턴에 의해 초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801년 대통령직을 맡은 그는 곧이어 루이지애나를 나폴레옹에게서 사들여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은퇴 후에는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했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들을 자명하게 여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은 누구나 창조주에 의해 특별히 소외받지 않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한 권리들 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 등이 포함된다. 어떤 사람도 대통령직에서 현재 자신이 지닌 평판을 끌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을 파괴하지 않고 인간의 생명과 행복을 배려하는 것은 훌륭한 정부의 최우선이자 유일하게 적법한 목표다. 항구적인 경계는 자유를 위해 치르는 대가다. 모든 재능 가운데서도 으뜸은 한 단어로 족할 것을 두 단어로 말하지 않는 재능이다. 한 번 거짓말을 해본 사람은 두 번째 거짓말이 훨씬 쉽다는 것을 안다. 화가 날 때는 말하기 전에 10까지 세어보라.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 때는 100까지 세어보라. 늘 활동하고 있는 마음은 늘 즐겁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참된 비결이자 지름길이다. 나는 행운을 크게 믿는다. 그리고 더 열심히 노력할수록 더 많은 행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레흐 바웬사
노동운동 지도자인 레흐 바웬사는 공산주의 폴란드 최초의 독립적인 노동조합인 연대자유노조의 의장이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그의 투쟁은 전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194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바웬사는 국립 직업학교를 다녔고, 그다니스크에 있는 레닌 조선소에서 전기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1970년 거리 시위에서 폭력적인 죽음을 목격한 뒤, 폴란드에 참된 자유노조를 결성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했다. 1980년 파업위원회의 위원장에 당선되었으며, 그다니스크의 다른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파업을 전개했다. 폴란드 정부가 계엄령을 발포하면서 연대자유노조는 불법이 되었고 바웬사는 체포되었다. 그러나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혁을 요구했으며, 마침내 1989년 폴란드 정부는 연대자유노조를 합법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원한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는 자유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다.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만 이성도 있어야 한다. 세계는 팽팽한 줄 위를 걸어가는 우리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 줄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균형이 필요하다. 나는 보지 못하겠지만 장차 사소한 폴란드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고, 전세계에 조화와 평화가 자리잡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 아이들과, 또 아이들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게 되기를 바란다. 그때까지 우리에게는 할일이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
인쇄업자, 출판업자, 저자, 발명가, 과학자, 외교관 등등 팔방미인이었던 벤자민 프랭클린은 식민 아메리카를 영국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독립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한 공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랭클린은 외교관 시절에도 발명가이자 과학자로서 꾸준히 활동했다. 프랭클린 난로, 이중초점 안경, 피뢰침 등이 그의 발명품이다. 또한 처음으로 소방서, 도서관을 공공 기관으로 만들었고 학술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가 되었다. 2회 대륙회의의 대표를 지낸 후에는 프랑스로 가서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적.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영국과 종전 협상을 벌이는 외교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미국 헌법을 채택하는 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현자는 충고가 필요없고, 바보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소한 지출을 주의하라. 작은 구멍이 큰 배를 침몰시킬 수도 있다. 세상에는 바보들과 소심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누구나 재난을 견딜 만한 용기는 가지고 있으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리할 만큼의 지혜를 갖추고 있다. 이웃을 사랑하라. 하지만 자기 집의 울타리를 허물지는 말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을 받은 것이다. 실망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바보의 가슴은 입에 달렸지만, 현자의 입은 가슴에 달려 있다. 열정에 휘말렸을 때는 이성으로 제어하라. 그는 말을 아홉 가지 언어로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학식이 풍부하지만, 소를 타려고 사려들 만큼 무지하다. 적을 사랑하라. 적은 당신에게 당신의 결함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현자란 누군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사람이다. 강자란 누군가? 자신의 열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부자란 누군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노력 없이는 결실이 없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당대에 가장 위대한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었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뛰어난 철학자, 음악가, 신학자, 의사이기도 했다.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의 알자스에서 태어났다. 스물한 살 때 자신의 인생 중에서 향후 9년 동안 과학, 음악, 설교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서른이 되었을 무렵 이미 신학에 관한 작가로서, 재능있는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리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권위있는 비평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날렸다. 성 토마스 신학대학에 다니던 시절 의료 전도 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6년간 의학을 공부한 뒤 아프리카에 병원을 세웠다. 슈바이처는 연주회와 강연에서 얻은 수입으로 병원 유지에 필요한 경비를 댔고 나중에는 나환자촌도 설립했다. 그간의 헌신적인 노력이 공적으로 인정되어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매일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하라.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단지 주요한 정도가 아니라 유일한 역할을 한다. 명백한 진리가 하나 있다. 세계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중심에는 정신적인 것이 있다. 정신의 힘이 강하면 세계 역사를 창조할 수 있고, 정신의 힘이 약하면 세계역사에 의해 고통을 겪는다. 인간을 위한 것보다 더 고결한 종교는 없다. 공통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장 큰 종교다. 자신의 문제를 주변 환경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자신의 의지와 개인적 책무를 다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있다. 나는 그것을 내가 지닌 위대하고 늘 새로운 특권으로 여긴다. 개인적 고통에서 면제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소명을 받았다고 여겨야 한다. 낙관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푸른 신호등을 보며, 비관주의자는 붉은 신호등만 본다. 그러나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은 색맹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군인, 정치가, 작가, 탐험가를 두루 거친 루스벨트는 미국의 26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인생에 대한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루스벨트는 해군의 차관보로 재직하다가 1898년에 사임하고 쿠바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영웅으로 개선한 뒤 그는 손쉽게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그 후 미국 부통령이 되었다가 1901년에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과 연방정부의 권한을 대폭 확장해서 공익을 바탕으로 대기업과 대형 노조 사이의 갈등을 처리했다. 1906년 러일 전쟁의 종전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추진했다. 투철한 자연주의자였던 루스벨트는 수천 에이커의 땅을 보호 구역으로 설정했는데, 그 땅들은 오늘날도 국립공원과 삼림으로 남아 있다.
"법 위에 사람 없고 법 아래에 사람 없다. 말은 부드럽게 하고, 지팡이는 큰 것을 가지고 다니라. 그런 사람은 멀리 갈 수 있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다. 법에 대한 복종은 부탁이 아니라 요구다. 유능한 간부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맡길 적임자를 고르는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가 그 일을 하는 동안 간섭하지 않을 만큼 자제력을 가져야 한다. 결정을 내릴 순간에 최선의 행위는 올바른 결정이고, 차선은 그른 결정이며, 최악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애국심을 퍼뜨리려다가 오히려 흐려지게 해서는 안 된다. 지혜의 9할은 적시에 지혜를 발휘하는 데 있다. 행동을 취하라. 순간을 포착하라. 사람은 딱딱한 껍질을 쓴 굴처럼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비정한 마음보다 더 나쁜 게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나약한 머리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의 지성들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분야에 이바지한 공로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879년 독일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물리학과 수학 강사로 일했다. 1905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네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논문은 특수 상대성 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1922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이 중요한 군사적 용도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인슈타인은 1939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을 개발하라고 권고했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분야에 기여한 공로로 물리학은 크게 변화되었다. 그의 발견은 우주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미래의 연구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분노는 바보들의 가슴 속에만 있다.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가치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 하루에도 수백 번씩 나는 내 삶이 살아 있거나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일깨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나 자신을 타이른다. 개인의 고결한 운명은 지배에 있지 않고 봉사에 있다. 어려움의 한복판에 기회가 있다. 나 자신과 내 사고방식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내게는 실증적인 지식을 흡수하는 재능보다 공상의 재능이 더 중요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경이로움과 경외감에 빠져들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맹인이나 마찬가지다. 배가 고프면 좋은 정치적 자문을 하지 못한다. 예쁜 여인과 한 시간 동안 함께 앉아 있다면 그 시간은 마치 1분처럼 짧게 느껴진다. 그러나 1분 동안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다면 마치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질 것이다. 그게 바로 상대성이다."


헬렌 켈러
헬렌 켈러는 1880년에 앨러배마의 터스컴비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 살도 채 되기 전에 심한 병을 앓아 시력과 청력, 말하는 능력을 모두 잃었다. 그녀의 삶은 신체적 장애를 극복한 인물의 대표적인 사례를 잘 보여준다. 앤 설리번의 끈질긴 가르침을 통해 헬렌 켈러는 글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배웠을 뿐 아니라, 1904년에는 래드클리프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여러 편의 글, 책, 자서전을 썼으며, 미국 맹인 협회와 해외 맹인들을 위한 미국 재단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25개국에서 강연 활동을 했고, 세계 유수의 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엄청난 장애를 이겨낸 헬렌 켈러의 용기, 신념, 낙관주의는 여러 가지 방면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녀의 놀라운 업적은 우리 모두가 지닌 잠재력의 상징이다.
"안전이란 대개 미신일 뿐이다. 자연은 결코 안전하지 않으며, 인간의 아이들도 대체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한다. 위험을 회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위험에 완전히 노출되는 것보다 안전하지 못하다. 용기와 모험심이 없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내게 역경을 내려주신 데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 역경을 통해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일, 나의 신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을성은 가장 큰 마음의 선물이다. 참을성은 자전거 위에서 균형을 잡는 데 필요한 것과 같은 두뇌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 얼굴을 해가 있는 쪽으로 향하면 그림자를 볼 수 없다."


해리 트루먼
미국 33대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은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의 혼란기를 맞아 정직과 용기, 결단력을 발휘함으로써 현대의 대중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1차 세계대전에 대위로 참전했던 트루먼은 판사와 상원의원을 거쳐 부통령이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945년에 죽자, 트루먼은 순식간에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신속하게 UN을 조직했고,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으며, 포츠담 정상회의에 참석했으며, 히로시마와 나가키에 원자탄을 투하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끝냈다. 1948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그는 마셜 플랜을 통해 서유럽의 경제 복구를 지원했으며, NATO를 결성하여 유럽의 비공산주의 국가들과 집단 안보 체제를 구축했다.
"역사가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배워라.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영원히 존중되는 새로운 세계,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역사가 인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정의는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우리는 오로지 정의의 엄청난 힘 앞에만 굴복할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나는 늘 정치가보다 군인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열기를 견딜 수 없다면 주방에서 나가라. 대통령이란 마치 호랑이 등에 타고 있는 것과 같다. 아래로 떨어지면 잡아먹힐 뿐이다. 적을 설득할 수 없다면 혼동시켜라. 아이들에게 충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아이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낸 다음 그것을 하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이웃이 일자리를 잃으면 불경기이고, 자신이 일자리를 잃으면 공황이다.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의 개척자인 월트 디즈니는 어릴 때부터 창조적인 재능을 선보였다.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바탕으로 그는 통신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만화를 공부했으며, 나중에 캔자스시티 예술학교와 디자인스쿨에 들어 갔다. 1920년대 후반 디즈니는 만화영화에 음향을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음성과 음악이 담긴 단편 만화영화 `증기선 윌리 호`를 만들어 미키마우스의 캐릭터를 소개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1930년대에 디즈니의 만화는 관중을 사로잡았다. 이후 여러 작품을 통해 장편 만화영화계의 거장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월트 디즈니는 48개의 아카데미상과 일곱 개의 에미상을 받았다. 그의 창조성과 독창성, 그리고 공상을 현실로 만드는 그의 능력은 이후에도 시대를 초월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것에 집착하라. 그것을 파고들어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하라. 요즘 같은 시대에 어느 누구든 자신이 완전히 자수성가 했다든가,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얄팍하고 건방진 태도이다. 어느 한 개인이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다. 가까운 인간관계가 공동의 성공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 데서 커다란 위안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때때로 닥쳐오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든든한 힘이 된다. 꿈을 추구할 용기만 있다면 어떤 꿈이든 실현될 수 있다."


조지 워싱턴
미국의 장군이자 총사령관으로서 식민지 군대를 지휘하여 미국의 독립혁명을 성공시키고, 이후 미국의 초대 대통령에까지 오른 조지 워싱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유한 버지니아 이주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워싱턴은 측량기사로 일하다가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곧이어 닥친 미국 혁명에서 조국은 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워싱턴은 1775년 식민지 전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5년여 동안 그는 포지 계곡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등 숱한 고난 속에서도 순수한 품성과 뛰어난 영도력으로 전군을 지휘했다. 결국 1781년 요크타운의 콘윌리스를 장악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곧이어 만장일치로 대륙회의의 주재자가 되었다. 1789년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4년뒤 재선되었다.
"자신의 명성과 평판을 고려한다면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는 게 좋다.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느니 차라리 혼자인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자신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에게 항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참된 우정은 서서히 자라난다. 숱한 역경을 거치고 견뎌내야만 우정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항상 내가 가장 탐내는 것, 즉 정직한 품성을 유지할 만큼 굳고 고결한 미덕을 가지고 있기를 바란다. 자유는 한 번 뿌리 내리면 순식간에 큰 나무로 자란다. 이성은 뒤늦게라도 잘못 보낸 어리석은 시절을 깨우치게 한다.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평화를 보존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다. 언론의 자유가 박탈된다면 우리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들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하게 될 것이다."


골다 메이어
골다 메이어는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데 이바지했고 4대 총리를 역임했다.(1969-74). 1898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나, 1906년 미국 위스콘신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밀워키 시오니스트 노동당의 지도자가 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 유대인 단체와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에서 두루 요직을 맡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뒤 노동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을 거쳐 1969년에 총리로 임명되었다. 정부를 이끄는 동안에는 외교적 수단으로 중동의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평화를 이루려는 그녀의 노력은 4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터지면서 중단 되었다. 1974년에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나 그 후에도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8년 그녀가 죽고 난뒤에 12년간이나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녀의 강인한 힘과 정신이 널리 알려졌다.
"움켜쥔 주먹으로는 악수를 할 수 없다. 진심으로 통곡해 보지 않은 사람은 진심으로 웃을 줄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성공여부를 따져본 적이 없다. 그저 옳다고 여기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고려하지 않고 행할 따름이다. 노년이란 폭풍우를 뚫고 날아가는 비행기와 같다. 일단 비행기를 타고 있으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나라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데 주저함이 없는 지도자는 올바른 지도자가 아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32대 대통령 프랭클림 델라노 루스벨트는 12년 이상 재임함으로써 역대 최장기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연방의 권한을 크게 확장시켜 대공항 기간에 경제 복구를 꾀했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로 활약했다. 구스벨트는 하버드 대학교와 컬럼비아 법과대학을 다녔다. 1910년 뉴욕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3년 뒤에는 해군 차관보로 임명되었다. 그는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민주당 소속으로 활발한 정치 활동을 전개했으며, 1928년에는 뉴욕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1931년 대통령에 당선된 루스벨트는 뉴딜이라는 광범위한 경제 정책을 신속하게 집행했는데, 이는 다양한 연방 기관들을 통해 구제, 차관,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정책이었다. 루스벨트는 군수 산업을 일으켜 영국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에 나섰다. 그는 영국, 소련과의 동맹을 이루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밧줄의 끝부분까지 갔을 때는 매듭을 짓고 매달려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두려움 자체뿐이라는 게 나의 굳은 신념이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는 네 가지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첫째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다. 둘째는 모든 사람이 자기 방식대로 신을 숭배할 수 있는 자유다. 셋째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다. 넷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우리는 항상 지평선 너머에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희망을 굳게 믿는다. 진리는 인간이 그것을 추구할 자유를 가질 때 발견된다. 내일을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오늘 품고 있는 회의 뿐이다. 연설에 관해. "성실하게 하시오. 간략하게 하시오. 자리에 앉아서 하지오." 우리 그리고 우리만큼 자유를 굳게 믿는 모든 이들을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우리는 전쟁을 끝내기보다 모든 전쟁의 시작을 끝내고자 한다."


샤를 드골
군인이자 작가이자 정치가인 샤를 드골은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활약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프랑스 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58년에서 1969년 까지 재임했다. 1차 세계대전에 중위로 참전했던 드골은 세 차례나 부상을 입고 3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 정부차관으로 승진했다. 친독일 성향의 비시 정부가 들어서자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 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저항 투쟁을 계속하라고 호소했으며, 그 때문에 부재중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드골은 자유 프랑스저항 세력을 구축하는 작업에 계속 전념했다. 결국 연합국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아 1944년 드골은 다시 새 정부를 구성하고 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묘지에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 가득하다. 위대한 일은 위대한 인물 없이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오직 위대해지려는 각오가 있어야만 위대해질 수 있다. 역사는 숙명론을 가르치지 않는다. 지금은 소수 자유로운 사람들의 의지로 결정론을 격파하고 새 길을 열어야 할 때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역사를 꾸리게 마련이다. 영광은 늘 그것을 꿈꿔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심사숙고는 많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행동은 한 사람만이 하는 일이다. 침묵은 궁극적인 무기다. 정치란 언제나 불리한 조건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위대한 리더들은 항상 자신의 영향력을 배후에서 조종한다. 행동적인 사람은 누구나 강한 자존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으며 냉혹하면서도 교활하다. 그러나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그 모든 것들은 고결한 자질이 될 것이다."


데일 카네기
데일 카네기는 연설과 인성 개발의 개척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의 저서인 `친구들을 얻고 사람들을 움직이는 방법`은 1,000만 부 이상 팔려나갔으며, 30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간단하고 매끄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섞어 연설하는 그의 방식은 사람들에게서 큰 인기를 모았다. 활동을 시작할 무렵 카네기는 `비즈니스의 연설과 사람들을 움직이는 법`을 썼는데, 이 책은 연설 방법의 표준 교과서로 자리 잡았다. 데일 카네기는 자신의 작업을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리즈 강연으로 조직했다. `효율적인 연설과 인간관계를 위한 카네기 학교`의 강의 내용은 50년 이상에 걸쳐 성공적인 비즈니스 활동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데일 카네기는 성공이란 끈기와 인내와 솔선수범의 소산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몸으로 직접 보여준 산 증거였다.
"자신의 현재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없다. 아첨은 입에서 나오지만, 진실한 생각은 가슴에서 나온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두 달만에 많은 친구를 만들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가지게 하려고 애쓴다면 2년이 걸려도 친구를 얻을 수 없다. 꿀을 모으려면 벌집을 걷어차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의무를 자신의 재산처럼 생각하기만 한다면 의무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최고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진취적이고 모험을 꺼리지 않는 사람이 가장 멀리 가게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보트를 타고서는 결코 해변에서 멀리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실패에서 성공을 끌어내라. 좌절과 실패는 성공을 향한 가장 확실한 디딤돌이다. 두려워지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생각을 집중하라.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면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가능하리라고 꿈도 꾸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


부커 워싱턴
1856년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부터 워싱턴은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지도자이자 교육자가 되었다. 그는 흑인들이 대학 교육보다 실용적인 직업 교육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흑인들의 경제적 성공을 도우려는 일환으로 그는 앨러배마의 터스키기에 흑인들을 위한 직업학교인 터스키기 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되었다. 터스키기 학교가 성공을 거두자 흑인과 백인의 공동진보가 가능하다고 굳게 믿은 워싱턴은 재빨리 정치 지도자로 변신해서 대통령과 의원, 주지사들에게 각종 자문을 해주었다. 그의 자서전 `노예 신분으로부터의 상승`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그를 전국적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인종 갈등이 고조되던 시대에 워싱턴이 취한 협력적인 방식은 흑인과 백인 양측에게서 지지를 받았다. 그 시대는 당연히 `부커 워싱턴 시대`라고 불렸다.
"밭을 가는 것도 시를 쓰는 것에 못지 않게 존엄한 일이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면 어떤 인종이라도 발전할 수 없다. 빼어나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은 방법으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공은 인생에서 도달한 지위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극복해낸 장애물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과 함께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을 얻을 수 없다. 세상은 한 개인이 얼마나 지식을 갖추고 있느냐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고, 그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느냐에만 주목한다."


레이 크로크
맥도널드 사를 설립한 레이 크로크는 외식 산업을 혁명적으로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고집과 근면 성실은 현대 기업 리더의 표상이 되었다. 크로크가 성공한 계기는 캘리포니아 샌버너디노에서 형제들과 함께 조그만 식당을 하면서 비롯되었다. 일관 작업 배치(기계 앞에서 각 단계별로 근로자가 배치되어 부분별로 제품을 완성해 나가는 방식;옮긴이)로 햄버거, 프렌치프라이,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그들의 방법은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이었다. 크로크는 이런 방식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크로크의 첫번째 맥도널드 상점은 1955년 4월 15일에 문을 열었다. 이후 크로크는 독특한 프랜차이즈 제도를 꾸준히 사세를 확장했다. 고개 서비스에 관한 그의 방식과 구상은 수많은 다른 기업들에게도 본받을 모델이 되었다. 자신의 구상을 지속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는 개인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자선과 교육 사업에서도 자신의 뜻을 펼 수 있었다.
"당신의 능력은 당신이 고용한 사람들이 좌우한다. 한 개인의 자질은 스스로 설정한 목표에 반영되어 있다. 원칙을 가진다는 것은 중요하다. 부자가 원칙을 가지기는 쉽지만, 중요한 것은 가난해도 원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싹틀 때는 성장하지만 다 익으면 부패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만든 것은 엄격한 원칙에 충실한 기업 조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