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이 원칙적이고 원리적인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하고자 했다면, 덩샤오핑은 중국의 인민이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는 실용주의적 사회주의를 펼치고자 했다. 이러한 정치적 이념의 차이는 결국 마오쩌둥과 보수파의 불신을 사게 되고, 이로인해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으로 부터 비판을 받고 실각하게 된다. 이후 세번이나 실각과 재기를 되풀이 하였으며, 5년간의 권력투쟁 끝에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 부자는 죄가 아니며, 가난이 사회주의도 아니다.
나는 부자나라의 보통 국민이 될 것이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라고 해서 가난할 필요가 없으며 부자는 죄가 아니다라고 강조함으로써 중국인민들에게 '모두가 잘사는 부자나라 중국'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이전 노동체제와 다른 자신의 능력에 맞게 보상받을 수 있도록 생산도급제를 실시하였고, 연안 지역에 경제특구를 설치하여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이 중국발전의 핵심임을 강조하며 문화혁명 때 숙청되었던 지식인들을 다시 불러들여 아낌없이 이들을 지원했다.
덩샤오핑은 정부 관리외에도 일반 인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장기간 기차를 타고 다니며 여러 지방을 순례하여 인민들을 지지하였으며, 건강이 나빠지기 직전까지 이를 멈추지 않았다.
"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마오쩌둥이 조직적이고 강압적인 리더십을 펼쳤다면, 덩샤오핑은 "못쓰게 되지 않았으면 버리지 마라"라고 말한 만큼 실용적이고 평화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이렇게 정칙적 이념과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지만,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이념과 정치적 체제를 고수하였는데, 외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천안문에 걸려있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영원히 걸어 둘 것이냐?" 질문에 덩샤오핑은 이렇게 대답했다.
" 과거의 잘못을 모두 그의 과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를 평가할 때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하며, 공이 우선이고 과오는 두번째입니다.
그의 초상화는 영원히 천안문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실리주의적 정책을 펼치고자 했던 그는 천안문사태에서 정치체제 개혁을 주장하는 학생과 민간인을 무력으로 제압하였다. 이는 그의 업적에 오점으로 남을 수 있으나 이에 " 누구에게나 결함이 있으며 완벽한 사람은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실수와 과오에 대해 인정할 줄 알았다.
또한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것을 철처히 경계하였으며, 무덤을 만들지말라는 유언아래 장기와 각막은 실험용으로 기부하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다.
마오쩌둥의 사망과 측근들의 비리로 인해 중국은 큰 사회적 혼란에 휩싸여있었고, 사회주의 체제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농촌의 농민들은 늘 가난에 허덕였고, 부자는 죄라는 인식에 맘껏 돈을 쓸 수도 없었다. 이러한 중국을 현재의 강대국으로 탈바꿈 시키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 덩샤오핑이다. 그는 한 국가의 리더로써 국민에게 공동의 비전을 제시하였으며, 사회주의 체제에 자본주의적 시장원리를 적용시킴으로써 변화와 혁신의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느 중국 상인이 자신의 가게 앞에 이와 같은 문구를 붙였다고 한다.
' 해방이 되어서는 마오쩌둥을 잊지않고, 부자가 되어서는 덩샤오핑에 감사한다.'